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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05, 2009

이름없는 꽃




                                                   @ 2009.04. 멍석작 / 온 산에 꽃 (화선지에 수묵, 물감)





이름없는 꽃

순원(淳園)의 꽃 중에 이름이 없는 것이 많다.
대개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사람이 그 이름을 붙인다.
꽃이 이미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어찌 꼭 이름을 붙여야만 하겠는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지만
어찌 음식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사람이 옷을 좋아하지만 어찌 옷의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여기에 맛난 회와 구이가 있으니 그저 먹어보기만 하면 된다.
먹어 배가 부르면 그뿐 무슨 생선의 살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 가벼운 가죽옷이 있으니 입어보기만 하면 된다.
입어보고 따뜻하면 그뿐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이 없다면 굳이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고,
좋아할 만한 것이 있어 정말 그것을 구하였다면
또 꼭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이름은 가리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가리고자 한다면 이름이 없을 수 없다.
형체를 가지고 본다면 긴 것, 짧은 것, 큰 것, 작은 것이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색깔을 가지고 본다면 푸른 것, 누른 것, 붉은 것, 흰 것이라는
말도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땅을 가지고서 본다면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라는
말도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가까이 있으면 ‘여기’라 하는데 이 역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멀리 있으면 ‘저기’라고 하는데 그 또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이 없어서 ‘무명(無名)’이라 한다면 ‘무명’ 역시 이름인 것이다.
어찌 다시 이름을 지어다 붙여서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하겠는가?
예전 초나라에 어부가 있었는데 초나라 사람이 그를 사랑하여 사당을 짓고
대부 굴원(屈原)과 함께 배향하였다.

어부의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대부 굴원은 『초사(楚辭)』를 지어 스스로 제 이름을 찬양하여
정칙(正則)이니 영균(靈均)이니 하였으니* ,
이로서 대부 굴원의 이름이 정말 아름답게 되었다.
그러나 어부는 이름이 없고 단지 고기잡는 사람이라 어부라고만 하였으니
이는 천한 명칭이다.
그런데도 대부 굴원의 이름과 나란하게 백대의 먼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 그 이름 때문이겠는가?
이름은 정말 아름답게 붙이는 것이 좋겠지만 천하게 붙여도 무방하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아름다워도 되고 천해도 된다면 꼭 아름다움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면 없는 것이 정말 좋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꽃은 애초에 이름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 당신이 유독 모른다고 하여
이름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없어서 없는 것도 없는 것이요, 몰라서 없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다.
어부가 또한 평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요,
어부가 초나라 사람이니 초나라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초나라 사람들이 어부에 대해 그 좋아함이 이름에 있지 않았기에
그 좋아할 만한 것만 전하고 그 이름은 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정말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는데,
하물며 모르는 것에 꼭 이름을 붙이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 굴원이 지은 『초사』〈이소(離騷)〉에 “선친께서 나의 출생한 때를 관찰하여
헤아리시어 비로소 내게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셨으니,
나의 이름을 정칙으로 하시고 나의 자(字)를 영균으로 하시었네.” 라고 하였다.


- 신경준, 〈순원의 꽃에 대한 단상(淳園花卉雜說)〉《여암유고(旅菴遺稿)》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글출처;화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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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03, 2009

가을의 노래




                  @ 2008. 멍석작 / 시월엔 (화선지에 수묵, 물감)



가을의 노래 / 김대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 보낸다.



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死者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死者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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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01, 2009

변하는 대로 그냥 놓아두라




                @ 2009. 멍석작 / 바보 (화선지에 수묵, 물감)




# 변하는 대로 그냥 놓아두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한다는 진리를 멈출수는 없다.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는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할 뿐.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치않고 항상할 뿐.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우리 자체가 곧 진리의 몸이 되어 버린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진리다운 현상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다.

변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는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도된 망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변화’한다는, 무상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란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하고 만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의 본연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바로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치않고자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두가 변화하는데 나는 변하기 싫고,

다 변하는데 내 것은 영원하길 바라며

내 생명, 내 소유, 내 사랑, 내 사상은 영원하길 바란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한다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그 흐름에 들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변치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라.

변화하도록 그대로 두라.



‘나’라는 것도 붙잡지 말라.

‘나’도 끊임없이 변화할 뿐,

거기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안주할 내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그 때에

있어야 할 곳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이다.



법계는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도 잡지 말라.

깨달음 또한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안주할 것이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깨달음은 잡았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았을 때 온다.

깨닫고자 애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조차 완전하게 쉴 때 온다.

깨달음 속에 안주하려 들지 말라.

안주하는 순간 깨달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느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라.



변화는 진리이니 그것을 따를 일이지

그것을 내 고집으로 붙잡고자 하지 말라.



이렇게 단순한 것이 불법이다.

단순한 진리를 공연히 머리굴려 어렵게 만들지 말라.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놓아두라.



그저 푹 쉬기만 하라.

푹 쉬면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함께 따라 흐르라.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놓아두라.

그저 놔두고 푹 쉬기만 하라.



-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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